1. 유이치 히라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오랜 시간 몰두해 온 작가입니다. 인간 중심적인 태도로 자연을 대하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고민하게 해요. 그의 전시에는 인간의 몸에 나무 머리를 한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작가가 2008년부터 그려온 이 캐릭터는 인간과 자연의 매개체인 동시에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상징이자 작가의 페르소나입니다. 이 캐릭터가 작품 대부분에 눈코입이 없는 상태로 등장한다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눈코입이 없는데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오싹해지거든요. 🌲
2. 캐릭터는 동식물이 살아가는 공간이자 일본 민속 설화 속 나무 정령들이 머무는 공간인 숲에 자주 등장합니다. 숲은 일부 종교에서 미개하게 혹은 신성하게 묘사되는, 극과 극의 이미지를 가진 공간인데요. 작가는 숲을 마치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색감과 효과로 가득 채웠습니다. 특히 작품 〈Memories of My Garden/A march〉에서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헷갈리게 묘사된 숲은 뽀글뽀글 소리가 날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있는 포탈이 열릴 것 같기도 했어요.
3. 유이치 히라코는 이번 전시에서 씨앗의 여행에 집중합니다. 전시 마지막에 있는 작품 〈The Journey (Traveling Plants)〉에서 이를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는데요. 인간의 이동은 국경에 가로막혀 자유롭지 못하지만, 씨앗에게 국경은 무의미합니다. 번식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해 온 씨앗은 바람을 타고, 물길을 따라, 때로는 새에게 몸을 맡기며 이리저리 옮겨 가 정착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하죠. 저는 전시를 관람하며 여행을 떠난 씨앗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들의 여행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
4. 제가 사는 아파트 뒷마당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공간이 있었습니다. 풀과 나무가 무성해 어릴 때는 동생과 나뭇잎 냄새가 가득한 그곳을 뛰어다니며 놀았던 기억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뭇가지가 잘려 나가더니 이제는 파릇파릇한 잎은 다 사라지고 나무 기둥만 남아있습니다. 전 오래되고 작은 아파트여서 관리가 어려워 잘라낸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행》을 본 뒤 인공적으로 조성한 곳을 ‘숲’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나무의 삶을 강제로 중단시키는 과정을 그저 ‘어쩔 수 없는 일’ 정도로 생각했던 것도 모두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전시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를 갖고 자연과 관계 맺어왔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어요.
5. 유이치 히라코의 작품을 처음 보면 그저 ‘캐릭터가 귀엽다’고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에 담긴 인간과 자연을 향한 메시지를 알고 나면 ‘저 캐릭터와 어떻게 인연을 이어가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캐릭터와 인연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좀 더 진지하고, 다정하고, 서로를 위한 관계로 바꿔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변하기도 전에 다 떨어져 버릴 만큼 기후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게 체감되는 요즘, 전시 《여행》을 보며 자연과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